지주회사 설립을 앞둔 SBS(사장 하금열)의 노사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노동조합 추천 몫의 사외이사가 감사위원회에서 결국 배제됐기 때문이다. 노조는 이를 '회사 쪽의 일방적 노사 합의 파기'로 보고 있다.
사장이 담화문을 발표하는 등 뒤늦게 진화에 나섰지만 그간 지주회사제 추진의 한 축을 맡아 왔던 노조의 이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도입을 목전에 둔 지주회사 제도가 경영 투명성은 담보하지 못한 채 되레 지배주주의 영향력만 키워주는 수단이 될 소지가 있다는 게 노조의 시각이다.
또 이번 사태는 SBS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에 대한 방송계와 시민사회의 반발로 비화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방송 정책당국의 최대주주 변경 승인만 남긴 상황에서 이는 체제 전환 마무리에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SBS, 주총서 노조 추천 사외이사 제외한 감사위원회 구성안 의결
SBS는 20일 오전 서울 목동 SBS 사옥에서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이사회 내 감사위원회 및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설치를 골자로 하는 정관 일부 변경, 사내·사외이사 선임, 감사위원회 위원 선임 등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 SBS가 이사회 내 감사위원회 및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설치를 골자로 하는 정관 일부 변경, 사내·사외이사 선임, 감사위원회 위원 선임 등의 안건을 의결하기 위해 20일 오전 서울 목동 SBS 사옥에서 정기 주주총회를 열었다. ⓒ언론노보 이기범 기자

이날 주총에서는 지난달 29일 SBS 이사회가 추천을 의결한 홍성주 SBS 제작본부장, 김진원 SBS 보도본부장, 김재백 SBS 방송지원본부장 등 3명이 신임 사내이사로, 안경태 삼일회계법인 대표이사 회장, 이승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김진욱 동서파트너스 변호사 등 3명이 신임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또 '감사위원회는 3인 이상의 이사로 구성한다'는 바뀐 정관에 따라 성한표 현 SBS 사외이사, 안 대표, 이 교수 등 3명이 감사위원회 위원으로 뽑혔다. 이사회가 의결한 선임 건이 주총에서 원안대로 통과됨에 따라 노조가 추천해 사외이사로 선임된 김 변호사는 결국 감사위원 명단에서 빠졌다.
이와 관련, SBS 노사는 지난달 11일 '회사는 노조가 추천하는 사외이사 후보 2명 중 1명이 사외이사로 추천되도록 노력한다', '감사위원회는 3항의 인사(노조 추천 인사)가 사외이사로 선임될 경우 위 인사를 포함해 구성하도록 노력한다' 등의 항목을 담은 특별합의서에 서명한 바 있다.
"표현은 '노력한다'지만 노조 추천 사외이사가 감사위원이 되도록 지배주주가 지지할 것이라는 구두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합의서에 서명한 것"이라는 게 노조 쪽의 설명이다. 이에 따르면 이사회가 회사 쪽이 추천한 사외이사 3명으로만 감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이를 주총 안건으로 제출한 것은 노사 합의 위반인 셈이다.
이날 주총에 앞서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본부장 심석태)가 주총장소인 SBS 사옥 13층 'SBS 홀'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고 △경영진의 공개 사과 △합의 이행 방안 즉각 제시 △사태 책임자 퇴진 등을 회사 쪽에 촉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노조는 '노사합의를 위반한 감사위원 선임 건의 부결에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SBS 주주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이날 집회에는 SBS 노조 및 언론노조·시민사회단체 관계자 50여 명이 참석했다.

	▲ 20일 SBS 정기 주주총회에 앞서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가 주총장소인 SBS 사옥 13층 'SBS 홀' 앞에서 언론노조·시민사회단체 관계자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사 쪽의 노사 합의 파기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경영진의 공개 사과 △합의 이행 방안 즉각 제시 △사태 책임자 퇴진 등을 회사 쪽에 촉구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

"경영 투명성 없는 지주사제, 지배주주 지배력만 더 강화"
SBS 우리사주 조합원들로부터 의결권을 위임받은 노조·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주총에도 참석해 찬반토론, 표결 등을 요구하며 김재백 본부장의 이사 선임 건, 감사위원회 위원 선임 건 등이 부결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최상재 언론노조 위원장(전 언론노조 SBS본부장)은 "지상파 방송사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방송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SBS의 지주회사 제도 도입에 합의했지만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 지배주주의 지배력이 강해지는 게 사실"이라며 "이를 견제·감시할 수 있는 인사가 감사위원으로 선임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배주주인 태영이 추천·선임한 위원 일색이면 감사위원회의 견제력이 되레 현행 독립 감사보다 떨어지는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조 추천 몫의 감사위원이 독립적이며 (지배주주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고 강조했다.
양문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은 "지주회사제가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제도라고 생각했지만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노사 합의를 통해 경영진의 횡포와 독주를 견제·감시할 수 있다고 노조가 약속했었기 때문"이라며 "SBS 노조가 처절하게 무너지고 논의 과정이 참혹하게 어그러지는 것을 봤다. 시민사회단체들이 그간 유보해 왔던 지주회사 체제의 전면 재검토를 고려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회사 쪽의 노사 합의 파기가 경영 투명성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면 활동가로서 방송통신위원회의 최대주주 변경 승인을 막거나 지주회사제 전환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이들의 지적과 요청에 따라 이날 주총 의결 과정에서 감사위원 선임 등 일부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집계하는 방식의 표결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부결 시도는 결과적으로 무위에 그쳤다. 부의안건들이 모두 원안대로 가결됐기 때문이다. 회사 쪽이 의결권 70% 이상의 찬성표를 이미 위임을 통해 확보해둔 상태에서 결과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던 셈이다.
노, "공개 사과하고 책임자 퇴진시켜야"…사, "오해엔 사과, 사태 재발시 문책하겠다"
SBS 노조는 주총 직후 성명을 내고 회사 쪽의 공개 사과와 책임자 퇴진 등을 거듭 요구하는 한편 "노사 합의 사항의 확고한 제도적 보장을 위해 노력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지주회사 제도가 경영 투명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관련 단체, 기관 등과 연대해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조의 반발이 지속되자 하금열 SBS 사장은 주총 당일 오후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다. 하 사장은 담화문에서 "전향적 제도의 도입 과정에서 법적·실무적으로 매끄럽지 못했던 것을 인정하며 협의 과정에서 노조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에 대해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함은 물론 재발시에는 책임자를 문책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노조 쪽이 감사위원회 구성을 두고 '노사 합의 파기'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안의 이해와 해석에 차이가 있다"며 "감사위원 선임은 법적으로 이사회와 주총의 고유 권한으로 노사 합의 대상이 아니라는 게 법률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라고 해명했다. 해명에 따르면 사장은 권한을 벗어난 약속을 노조에 해줬던 셈이며 합의서의 '노력한다'는 표현도 책임 없는 구두선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심석태 언론노조 SBS본부장은 "차제에 책임자를 확실히 문책해 정상적 노사관계를 세우는 게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말했다. 또 "민영방송의 경영 투명성과 관련된 이번 문제를 민영방송노조협의회 차원에서 공식 의제로 채택해 민방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제도화를 추진하고, 언론노조 차원에서도 방송계의 중요한 공통 의제로 삼는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